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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5. 15:43 - 덕테

3. 격물치지(格物致知)

  유가 경전의 핵심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大學)에서 제시하는 8조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유명한 구절이다. 대학의 8조목이란 格物(격물) 致知(치지) 誠意(성의) 正心(정심) 修身(수신) 齊家(제가) 治國(치국) 平天下(평천하)의 여덟가지 항목들을 말하는데, 특히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부분은 가훈으로도 많이 사용 될 정도로 익숙한 구절이기도 하다. 단순히 이 8조목에 대해서 말하자면 "배우면 지식이 늘어나고 그렇다면 마음이 올바르게 되고, 스스로를 수양한 후에는 가정을 다스리게 되며, 가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천하를 안정되게 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데(의역이긴 하지만, 한자를 보면 대부분 그 의미는 짐작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는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격물치지성의정심 부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 격물치지라는 두 조목은, 특히나 논쟁을 많이 불러오는 구절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 조목의 해석에서 드러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조목의 해석방향에 따라서 선지후행(先知後行) , 지행합일(知行合一) 이라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핵심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후행과 지행합일에 대한 논의는, 이 바로 다음 글에서 한번 다뤄보도록 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선지후행과 지행합일의 근본적인 부분인 격물치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사실 왜 다른 구절은 크게 문제가 없는데, 격물치지는 이렇게 다른 학파를 만들어 버릴 정도로 논란이 많은가 하면, 대학에서 이 8조목을 설명할때 나머지 구절들은 평천하까지 선후관계로 서술하지만, 이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상세하게 말하자면, 다른 부분은 평천하 하기 이전에 치국해야 하며...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만 격물치지에 대해서만은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 이라고 설명한다. 치지재격물을 해석해보자면 말 그대로 "치지는 격물에 있다." 라는 뜻인데, 이것이 치지가 먼저인지 아니면 격물이 먼저인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격물과 치지는 무엇일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주희는 격물보전(格物補傳)에서 격물은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하는 것.(即物而窮其理也)" 치지는 "나의 앎을 지극히 하는 것(致吾之知이라고 표현한다. 조금 더 쉽게 해석해보자면 (이 해석은 아무래도 주희의 입장에서의 격물과 치지지만... 그래도 대부분 이런 뜻으로 사용한다.) 격물은 ‘investigation of things'이고, 치지는 ’extension of knowledge' 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격물은 사물을 연구(?)하는 것, 치지는 앎이 넓어지는 것 이다. 사실 이와같은 해석으로 격물과 치지를 바라본다면, 격물과 치지의 방향은 거의 논쟁이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무언가 공부를 해야 앎이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주희의 해석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냈으며, 관학으로써 자리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왕양명은 격물치지를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했다. 양명은 치지란 "내 마음의 양지를 극진히 이루는 것(致吾心之良知)"이며, 격물은 "사사물물이 모두 그 理를 얻는 것(事事物物皆得其理者)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지란 인간이 본되 가지고 있는 마음인데, 양명은 양지(良知)가 곧 천리(天理)라고 주장했다. 양지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본성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이는 곧 사람의 마음(心)이며 이것이 곧 천리(天理)라는 것이다. 이런 양명의 사상을 심즉리(心卽理)라고 한다.


  즉 양명에게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곧 그 자체로써 천리이며, 따라서 치지에서의 知는 곧 양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양지를 잘 다스리는 것이 먼저이고, 그 양지를 사사물물에 적용시키는 격물이 나중에 온다. 따라서 치지가 격물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런 양명의 생각은, 양명 스스로도 자신은 맹자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만큼 유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찌르는데, 유학에서 인간의 마음은 곧 성선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마음 자체가 선한데, 다른 어떠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하냐는, 주자학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약점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물론 주자학(성리학)이 인간의 마음이 본디 선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은 性과 情으로 '구분'한다. (주의할 것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지만, 그중에서도 성과 정으로 구분된다는 것이지 구별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성은 '마음이 구현하고 있는 理' 즉, 하늘에게서 받은 형이상적인 것이며, 정은 경험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써 희노애락을 포함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일체의 감정을 포괄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쉽게말하자면 정은 그냥 희노애락같은 인간의 마음이고, 성은 그것이 따라야하는 기준이며 형이상적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성은 정과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형이상적인 존재로써 정이 따라야 할 기준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성즉리(性卽理)라고 한다.


  즉 주자에게는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의 마음인 정이,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수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수양의 방향은 자연스럽게 격물에서 치지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양명의 사상은 원래 양지가 자신 마음에 있다는데 그럼 수양할 핋요가 없는 것 아냐? 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절대로 아니다. 양명도 유학자다. 당연히 수양을 중요시 한다. 양명과 주희의 모두 수양을 중요시했지만, 그 이론적인 측면에서 정 반대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주희는 성을 따르기 위해, 양명은 내 마음속 양지를 다스리기 위해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양명의 수양은 마치 '때가 낀 전구를 닦는 것' 과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무슨뜻이냐면, 전구는 밝지만 그 주위에 때가 있어 전구가 제대로 빛을 바라지 못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 전구(양지)가 빛나기 위해서 때를 닦아주어야 하며, 이것이 양명의 수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격물치지를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서 양명과 주희는 다른 입장을 보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둘 다 유학자 답게 수양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처럼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하며 살아오는 일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격물'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