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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25. 03:33 - 덕테

정의란 무엇인가- 관례와 정의와의 관계

  정의란 무엇인가. 이 한 문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거리를 주었는지는 말 하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질문임은 틀림 없다. 한창 유행이었던 하버드 대학 센델의 강의 명 또한 '정의란 무엇인가.' 이고, 동명의 책도 엄청나게 많이 팔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어떻게 보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게 되었다. 사실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 몇가지나 있겠냐만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의라는 것을 한번쯤은 자기 스스로 정의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앞으로 살아갈 지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플라톤의 저술인 국가론 대화편을 인용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정의해보려고 한다.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 만큼 조심스러운 일도 없지만, 고대의 현명한 철학가들의 생각을 짚어보는 것도, 자신의 정의를 정의하는데 있어서 많은 동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의' 이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있겠지만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흔히 말하는 정의란 도덕과 별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 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의라는 것은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기 쉽상이다. 가령 정의를 '관례를 따르는 것' 이라고 생각해 보자. 관례대로 어른들을 공경하고, 관례대로 예의바르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 자체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식사를 할때 소란스럽지 않고 단아하게 먹는다거나, 대중교통에서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한다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다거나, 이런 것들이 '관례'인 것이고, 정의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정해져있는 관례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다.' 라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데, "무기를 빌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나중에 친구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와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합니다. 이 경우에 그것을 돌려주지 않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 아닐까요?" 라는 것이다. 관례를 따른다면 친구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정의겠지만, 이런 경우에는 관례을 따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에 대해서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 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 라고 한다면, 정의로운 행동은 결국 이성을 배제하게 된다. 관례를 따르면서 올바른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 본연의 이성에 기초한 것이 아닌, 단순하게 관례를 따른 것 뿐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쁜 길로 빠져들 수 있게 된다. 가령 위의 예시같은 경우에, 관례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친구에게 무기를 돌려주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자신의 이성에서 나온 정의가 아닌, 정해져있는 관례이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정의로운 사람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 수 밖에 없다. 예를들면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을 억압하는 정권에 대해서, 국가에는 충성을 해야 한다는 관례만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인가? 이런 경우에는 그 불의한 상황을 타도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 틀렸냐 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 악한 본성을 제어해 줄 수 있는 관례라는 고삐로 악한 본성을 묶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의 기본 전제이다. 만약 관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만인은 만인에게 이리인 상태가 될 수 밖에 없으며, 관례는 인간의 동물적 충동을 제어함으로써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악법도 법이다.' 라는 소크라테스가, '관례를 따르는 것이 정의'라는 논리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그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정의라는 것이 인간 외부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유쾌한 폭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 있다. 트라쉬마코스 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정의에 대해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로 단순 명쾌하게 정리한다. 관례라는 것은 단순히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포장해서 남들에게 따르라고 정해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획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위위에 서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정의라는 것은 결국 이 본성을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관례라는 것은, 강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놓고 포장해 둔 것일 뿐이며, 이를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은 강자의 희생양이라고 이야기 한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렇게 관례를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강자의 희생양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국가는 국민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이것이 관례로 미덕처럼 정해져 있다. 하지만 국가에 충성하라는 것은,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국가 수뇌부들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포장해 둔것일 뿐이다. 국민들이 국가에 충성함으로써, 강자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할 수 있지만, 관례를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국가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고, 큰 장애를 얻은 사람들에게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주는가? 단순히 약자들은 그 관례를 지키며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지만, 그들의 희생을 이용하여 강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했을 뿐이다. 이렇게 강자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의 희생을 관례로 정해놓고, 그것을 마치 미덕처럼 꾸미고 포장하는데 주력한다.

  그렇다면 관례를 따르는 것은 더이상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명제에 도달하고 만다. 관례라는 것이 강자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고 포장해 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소크라스에 의하면 덕의 형식을 추구해야한다고 하지만, 이처럼 철학적이고 형이상적인 개념은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덕의 형식은 일종의 형이상적인 것인데, 관례에 덕의 형식이 내제되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적으로 관례가 덕의 형식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덕의 형식이 관례에 우선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관례 속에 관통하는 덕의 형식을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인데, 앞의 두 사람처럼 명쾌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식으로 고민하고 어떤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그 방향타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고라는 생각은 든다. 인간으로 하여금 덕의 형식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교육을 해야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개개인의 이성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관례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다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관례를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도, 관례 그 자체에 존재하는 덕의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정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할지에 대해서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인류의 영원한 난제임은 틀림 없다.